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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의 궁중에서의 삶
<한중록> 저자
1. 집안 배경
사도세자 즉, 장헌세자의 빈이자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재위 1777~1800)의 생모이다.
1735년 (영조 11년) 6월 18일, 영의정 홍봉한의 차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며,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낸 홍현보이다. 1744년(영조 20년) 10세의 나이에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다.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까지 역임했지만 <한중록>에 적힌 바에 의하면 당시 집안이 넉넉하지 않아 언니를 시집보낼 때와 혜경궁 홍씨가 출가할 때 혼수품이 넉넉하지 않았다 한다.
2. 입궁하다
1750년 (영조 26년) 장남인 의소세손을 낳았고, 1752년(영조 28) 차남인 정조를 낳았다. 그리고 뒤이어 청연공주(1754~1814)와 청선공주(1756~1802)를 낳았다. 영조는 첫 손자 의소세손을 매우 아꼈으나 의소세손 이 정은 3세(만1세) 때 요절했으며, 그 해 정조 이 산을 낳는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궁녀 숙빈 임씨가 아이를 가지자 (은언군) 영조의 질책이 두려워서 때려서라도 낙태를 시키려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혜경궁 홍씨가 임씨를 가여워 하여 챙겼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숙빈 임씨가 아이를 낳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아직 어린 세자가 궁녀에게서 일찍 자식을 본 것이 못마땅하여 아들 사도세자를 크게 꾸중했고 숙빈 임씨를 챙겨준 혜경궁 홍씨까지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이후에도 임씨에게서 은신군, 또 다른 궁녀인 박씨에게서 청근현주와 은전을 얻어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경빈 박는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사도세자의 폭행으로 사망하였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 영조 또한 사도세자의 후궁들과 그 자녀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혜경궁 홍씨가 오히려 연민을 느꼈다.
3.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
1762년 (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란 자가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자, 영조는 친히 국문을 하였다. 1762년 (영조 38년) 7월 4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참혹한 형벌을 내렸다.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 세자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결국 폭염 속에서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사망하였다. 당시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겠다는 명을 내리고 한밤중에 세자빈이던 혜경궁 홍씨와 세손인 정조 등을 모두 친정인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했다. 그래서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야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에게 왕세자의 호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이라는 존호를 내려주었다.
4. 정조, 즉위하다.
1776(정조 즉위년)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니,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에게 혜경궁이라는 궁호를 받았으며, 자궁(慈宮)이라 불리게 된다. 전통적으로 왕실에서 국왕의 적모를 일컫는 칭호는 '자전(慈殿)'이었다. 왕실 내명부 여인 중 나이로 치면, 가장 연장자였지만 홍씨의 살아 생전에 사도세자가 국왕으로로 추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왕대비가 되지 못했다. 정조 가 백부 효장세자의 아들로 양자 입적되면서 법적으로는 왕의 어머니조차 아니었기 때문에 '자전(慈殿)'이라는 칭호 조차도 쓰지 못하였다. 따라서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혜경궁 홍씨는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 1778년(정조 2년)에 효강(孝康), 1783년 (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받았다. 1795년 회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썼는데, 이 작품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더불어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5. 그녀의 말년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조의 아들이자 혜경궁 홍씨의 손자인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 홍씨와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가 크게 대립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혜경궁 홍씨의 남동생 홍낙임을 신유박해를 계기로 벌하려 했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단식을 하면서까지 반대했고 며느리였던 수빈 박씨도 합세해 손자 순조에게 기대어 정순왕후의 뜻을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유배를 가게 되면서 일단락 되었다. 당시 혜경궁 홍씨에게 문후(問厚)를 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순조는 물론이고 왕대비인 효의왕후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마저도 정순왕후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순조가 순원왕와 가례를 올릴 때도 혜경궁 홍씨는 폐백을 받지 못했다.
1814년(순조 14년), 정순왕후가 죽은 뒤,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신원, 복권되었다. 또한 홍봉한의 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순조에게 요구한다. 이심도는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1805년(순조 5년)부터는 담현증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워 있었다. 1815년(순조 15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다.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여 고종이 승인하여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광무 3년) 장종(장헌세자)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이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에 남편인 장헌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인근에는 정조와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능인 건릉도 위치해 있다.
출처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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