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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조선, 인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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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 됐다가 다시 복위된 유일한 왕비
인현왕후 민씨






1. 왕비로 등극하다.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차녀이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승하하면서, 그 뒤를 이어 15세의 나이에 숙종 계비로 책봉되었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죽고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에 의해 왕비로 간택 되었다. 하지만 숙종은 궁녀였던 장옥정(훗날 희빈 장씨)을 마음에 두고,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하였다. 당시 장옥정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궐밖에서 살고 있었지만 숙종은 항상 장옥정을 마음에 품고 좋아하고 있었다. 장옥정은 서인과 정치적으로 대립세력이었던 남인이었기 때문에 후궁으로 머물수가 없었다. 당시 조정의 실권은 인현왕후의 집안과 같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승하하자 숙종은 1686년 3년 상을 마치고 장옥정을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

 

 

 

 

 

 

 

 

2. 희빈 장씨와의 대립 관계

 

 

 

 

당시 서인의 영수이자 숙종의 신임을 받았던 김석주가 사망하고,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도 세상을 뜨자 8년간 집권했던 서인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숙종 또한 만만치 않은 권력을 가진 서인에 위기를 느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희빈 장씨가 다시 입궁하고 난 뒤 인현왕후 민씨의 태도가 바뀌었다.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영빈 김씨를 들이도록 하기도 했고, 또는 희빈 장씨의 버릇을 고친다며 아랫사람을 시켜 종아리를 친 일도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명성왕후께서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희빈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 하였다. 숙종 입장에서는 어머니를 빌려 이러한 발언을 한 인현왕후가 점점 미워지지 않았나 싶다.

 

 

 

 

 

 

 

 

 

3. 폐위되다.

 

 

 

 

1688년 희빈 장씨가 아들 윤(훗날 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아직 인현왕후에겐 아이가 없었다.

서인 측은 책봉 문제에 반기를 들었으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송시열이 숙종에게 올린 상소문을 빌미로 숙종은 서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1689년(숙종 15년)에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으로 인해 서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난 뒤 남인들이 집권하기 시작했고, 인현왕후도 폐위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서인이 되었다.

인현왕후가 폐위 된 뒤, 숙종은 폐비 민씨의 남겨진 물건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으며, 폐비 민씨가 가례를 올릴 때 입었던 장복은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 심지어 숙종은 "인현왕후와 가례를 올리는 날에 지진이 있어 어쩐지 불길했다." 라고 직접 말하기까지 했다.

 

 

 

 

 

 

 

4. 복위되다

 

 

 

 

 

1693년 궁녀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잉태하자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마음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1694년 4월 1일 남인이 주도하는 역모사건이 고변되었고 갑술옥사가 일어나 서인 세력이 다시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 갑술환국이다. 이때만 해도 숙종은 폐비 민씨를 다시 부를 마음이 없었으나 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4월 12일 마침내 폐서인이었던 폐비 민씨도 왕후로 복위하였다. 동시에 희빈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 받았다.

복위된 이후에도 아이는 낳지 못했으며, 희빈 장씨의 아들인 왕세자(훗날 경종)가 인현왕후 아래로 입적된다.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의 자식인 왕세자를 친아들 못지않게 예뻐했으며, 왕세자도 인현왕후를 매우 잘 따랐다고 한다. 인현왕후의 오라비인 민진의 <단암만록>에서도 인현왕후가 말하기를 세자(훗날 경종)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조석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사모하고 공경함이 사친(희빈 장씨)한테 하는 것보다 낫다"고 표현했다는 기록이 있다.

 

 

 

 

 

 

 

 

5. 마지막

 

 

 

 

 

1700년 (숙종 26년) 3월 26일, 인현왕후의 발병이 처음 보고됐다. 기록에 따르면 양쪽의 다리, 특히 오른쪽의 통증이 심했으며, 다리가 붓고 통증이 심해 참기도 어려운 상태였으며 4월 14일부터 다리에서 경련이 시작되어 전신의 경련으로 이어지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점차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회복하지 못하였다.

오심,구토설사 이 끊임없이 나타났고, 먹는 것도 힘들어서 겨우 먹은 것도 모두 게워냈다고 한다. 1701년(숙종 27년) 7월부터 기력이 쇠해졌고, 숨 쉬는 게 힘들어지는 등 죽기 직전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8월 12일, 구강에 부스럼이 생기고 소변은 붉은 색을 띄고 막혔다.
1701년(숙종 27년) 8월 13일에는 친정 오라비인 민진후와 민진원 숙종이 궁궐로 불러들인다.

결국 복위한지 8년 후인 1701년(숙종 27년) 8월 14일, 향년 35세의 나이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능을 조성하면서 훗날에 인현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으며, 실제로 숙종이 사망한 뒤 인현왕후의 곁에 묻혔다.

인현왕후의 능은 경기도 고양에 위치하고 있는 명릉(明陵)이다.

 

 

 

 

 

 

 

 

 

 

 

 

 

 

출처

나무위키

지식백과

위키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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